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쵸노 마사히로 (문단 편집) == 커리어 == 무토 케이지와 함께 데뷔하였으며, 데뷔전 또한 이 두 사람의 싱글매치였다. 이 경기에서 무토 케이지에게 패배한 이후, 때론 반목하면서도 때론 협력하는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투혼 삼총사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흥행 카드로 자리잡는다. 1988년에 정식으로 투혼삼총사를 결성한 이후 미국과 일본을 활발히 오가며 커리어를 쌓게 된다. 그러나 1990년에 당시 "스터닝"이라는 별칭을 사용하던 [[스티브 오스틴]]의 [[파일 드라이버(프로레슬링)|파일 드라이버]]를 잘못 맞아 목이 골절되는 큰 부상을 입게 되며, 이후 고질적인 목 부상으로 고생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스티브 오스틴 역시 [[오웬 하트]]의 파일 드라이버를 잘못 맞고 목이 부러져 커리어 내내 목 부상으로 고생한다. 1991년에 개최된 최초의 G1 클라이맥스에서 무토 케이지를 이기고 우승했다. 1992년 8월 12일엔 [[릭 루드]]를 이기고 G1 클라이맥스에서 우승한 동시에 특전으로 공석이던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차지한다. 데뷔 후 파이트 스타일은 오소독스한 편이었으나, 1994년에 G1 클라이맥스에서 우승한 후 테마곡과 경기복을 바꾸고 턴 힐을 하면서 파이트 스타일을 바꾼다. 1995년에는 [[텐잔 히로요시]], 히로 사이토와 악역군단 '''늑대 군단(狼群団)'''을 결성했다. [[파일:external/wolfpac-to-hollywood.tripod.com/49japan.jpg]] 1996년에는 [[WCW]]에서 [[nWo]]에 가입하고, 이후 그 컨셉을 그대로 들고와 신일본 프로레슬링 내에서 '''nWo Japan'''이라는 스테이블을 만든다. 이때가 쵸노 마사히로의 리즈시절로, [[IWGP 헤비웨이트 태그팀 챔피언십]]에 검은 스프레이로 nWo를 그리고 나오는 등 똘끼 넘치는 행동으로 카리스마를 어필했다. nWo JAPAN은 일본에서 사회적인 현상이 되는데 1997년에 nWo JAPAN T셔츠의 매상만 '''6억엔'''이었고, 신일본 프로레슬링도 이 해에 '''일본 오락부분 법인 소득 순위 85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이에 당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위상은 일본 내 어떠한 단체도 넘볼 수 없을 만큼의 위치로 오르게 된다. 무토 케이지와 쵸노 마사히로가 한 팀에 속하고 든든한 2진급 멤버로 텐잔 히로요시가 버텨준 덕이다. 텐잔 히로요시는 쵸노 마사히로와 함께 IWGP 태그 타이틀 판도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무토 케이지는 싱글매치에서 맹활약했다. 이후 쵸노 마사히로의 부상으로 리더가 된 무토 케이지와 부상 이후 돌아온 쵸노의 알력 다툼이라는 컨셉으로 쵸노의 TEAM 2000 대 무토의 nWo JAPAN의 구도가 형성되어 항쟁을 벌인다. nWo JAPAN은 2000년대 초반까지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스테이블 구성에 있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역사다. 1997년에는 일본 연간 프로레슬링 대상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8년에는 [[후지나미 타츠미]]를 꺾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획득하지만 목 부상의 재발로인해 방어전조차 갖지 못하고 타이틀을 반납한다. 무토 케이지와 하시모토 신야가 [[안토니오 이노키]]의 이노키즘에 반발해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탈퇴했을 때 신일본의 현장 감독을 맡는데, 팬들은 쵸노 마사히로가 신일본의 암흑기에 있어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신일본은 망했을 것이라고 평한다. 이노키즘 때문에 격투가들이 지배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링에 [[미사와 미츠하루]], [[코바시 켄타]][* 2000년대 초반의 [[프로레슬링 NOAH]]는 성황리에 흥행을 열던 상황이었고, 안토니오 이노키를 불신했기 때문에 미사와 미츠하루와 코바시 켄타는 원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참전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둘 다 쵸노 마사히로라면 믿을 수 있다면서 쵸노와의 싱글 매치로 신일본에 출전한다. 그래서 쵸노 마사히로는 미사와 미츠하루와의 경기에서 30분 시간 초과 무승부를 기록한 후 프로레슬링 NOAH에 출전했으며, [[GHC 헤비웨이트 챔피언]]인 코바시 켄타에게 도전한 경기에서는 패배하며 믿음에 보답했다. 프로레슬링 NOAH도 신일본의 암흑기 때 호의를 베푼 덕에, 2000년대 후반부터 침체기에 들어 미사와 미츠하루의 사망까지 겹치게 되었을 때, 2016년 말까지 지속적인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교류로 도움을 받게 된다.]를 초빙해 상대하며 프로레슬링으로 명승부를 만들었다. 또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대일본 프로레슬링 소속 선수들의 경기를 신일본의 링 위에 올렸다. 한편 안토니오 이노키가 사위인 사이먼 이노키의 요청대로 [[차이나(프로레슬러)|죠니 로라]]를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링 위에 올려 [[자도&게도|게도]]와[* 게도 본인이 '2002년에 [[차이나(프로레슬러)|죠니 로라]]랑 나랑 치룬 싱글매치는 아마 신일본 역사상 최악의 매치였을 것이다' 라고 자조했을 정도로 심각한 퀄리티의 경기였다.] 엘 사무라이가 죠니 로라와의 싱글매치에서 급소 차기를 맞고 KO 당하는 굴욕을 겪게 되자 후배들의 격을 지켜주고, 일정 수준의 경기를 링 위에 올리고자 본인이 직접 죠니 로라를 상대하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마카베 토우기]] 같이 힘들어하는 후배들이 힘을 낼 수 있게 격려를 해주는 등 링 위의 기믹과 달리 인망이 높다. 초대 G1 클라이맥스 우승, 1회와 2회 대회 우승으로 2연속 G1 클라이맥스 우승, 다섯번으로 G1 클라이맥스 최다 우승의 기록을 가진 사나이답게 기량이 무뎌진 2000년대에도 G1 클라이맥스 시즌에 좋은 수준의 경기를 만들곤 했다. 선수로서의 활동을 중단한 후엔 G1 클라이맥스 결승전 등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중요한 경기 때 스페셜 게스트로 중계석에 참가한다. 선술하듯 2014년 이후 경기를하지 않았으나 2023년 2월 21일, [[KEIJI MUTO GRAND FINAL PRO-WRESTLING 'LAST' LOVE ~HOLD OUT~|무토 케이지의 은퇴 시합]]에 게스트 해설로 참여, 메인 이벤트 이후 즉석에서 무토와의 이벤트 매치를 가지며 9년만에 프로레슬링 링에 섰다. 결과는 쵸노의 승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